절기 및 기념 예배 설교

빛이 임하게 하옵소서! (롬 13:12-14) : 목사 주태근

주 바나바 2023. 4. 17. 09:51

빛이 임하게 하옵소서! (13:12-14)

충남노회 소속 실옥교회(온양 실옥리)

 

목사 주태근 : 나라위한 기도주일(광복절)

 

프랑스 파리에 있는 오르세 미술관에 여러 작가들의 그림들이 전시되어 있습니다. 그 그림들 중에 유명한 반 고호의 그림이 있습니다. 밀밭으로 거센 바람이 불고 있습니다. 벌판 전체가 흔들리는데, 새 한 마리가 하늘로 솟구치고 있습니다. 이 그림 속에서 고호는 자유를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가 얼마나 자유를 원했던지, 바람결에 사정없이 흔들리는 밀의 숲 같은 세상에서 새처럼 한없이 날고 싶은 것입니다. 자유를 향한 몸부림, 이것이 고호의 작품 전체의 주제입니다. 또한 그는 유난히도 태양과 함께 그림들을 많이 그렸습니다. 그래서 그를 태양의 화가라고도 부릅니다.

 

그것은 자유에 대한 열망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는 자유하지 못했습니다. 그는 외로웠습니다. 병들어 신음하면서도 그는 그림을 통해서나마 자유하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잘 되지 않았습니다. 자신의 귀를 그리기 위해서 자기의 귀마저 잘랐건만, 자유 할 수 없었습니다.

 

결국 정신이상이 된 고호는 스스로 권총을 가지고 자기의 머리에 쏘아 자살함으로 세상에서 자유 할 것을 희망했습니다. 그러나 그가 선택한 길은 자유가 아닌 절망입니다. 해방이 아닌 또 다른 갇힘입니다. 인간이 스스로 자유 할 수 있을까? 우리는 결코 우리의 힘으로 자유 할 수 없습니다.

 

국내에서 작년 말에 개봉하여 상영된나니아 연대기라는 영화가 흥행입니다. 비디오테이프를 빌려서도 로 볼 수 있습니다. 이 영화는 기독교 세계관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가상세계를 전제로 만든 환타지 영화입니다. 이 땅에서 벌어지고 있는 영적 전쟁을 판타지 기법으로 빛의 세력과 어둠의 세력 사이의 전쟁을 그리고 있습니다. 이 영화는 신학자이자 작가인 C. S. 루이스의 소설을 영화화한 시킨 것 입니다.

 

원래 루이스는 아내와 사별한 뒤에 인생을 포기하려고까지 했던 사람입니다. 매일 아내와의 추억을 떠올리며 일기를 쓰는 것이 유일한 위로였습니다. 너무 큰 슬픔 속에서 정신적으로 방황을 했기에 그의 간절한 기도는 정신병자가 되지 않게 해 달라는 기도제목이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기도 중에 주님을 깊이 만나게 되었습니다. 한 줄기 빛이 자기의 영혼 속에 비쳐오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그 순간 그는 자기를 향하신 하나님의 비전이 있음을 깨닫게 됩니다. 슬픔을 딛고 일어섰습니다. 그리고 제일 먼저 쓴 책이 [슬픔을 다하다]라는 작품입니다. 그리고 주옥같은 기독교 명작들을 발표하게 됩니다. 그 중에 하나가 이 [나니아 연대기] 라는 문학작품입니다. 그렇습니다. 빛이 임하면 어둠이 물러가고 밝은 세상이 오듯이 우리 심령에 영적인 빛이 비춰오면 새로운 인생이 시작 됩니다.

 

광복절은 말 그대로 빛을 찾은 날이요 주권을 되찾은 날입니다. 오늘 우리는 광복절을 기념하면서 나라를 위한 기도주일로 예배드립니다. 광복절은 우리 민족이 지난 날 36년 동안 일본사람의 고통스러운 지배 밑에서 신음하다 자유의 빛을 회복한 날입니다.

 

우리나라는 1910년에 한일합방 되었다가 1945815일 해방되었습니다. 지난날 우리 민족은 일본의 통치 밑에서 너무나 많은 것을 빼앗겼습니다. 신앙의 자유를 빼앗겼고, 창씨개명을 해야만 했습니다. 말과 글을 빼앗겼으며, 딸과 누나들이 정신대에 끌려가서 모진 수치와 학대를 당했습니다.

 

아버지와 남편들이 보국대에 끌려갔고, 아들과 형들은 징용에 끌려갔습니다. 양식을 공출 당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일본은 1945817일에 우리 민족과 교회 지도자 3만 명을 죽일 계획까지 세우고 있었습니다. 해방이 3일만 늦었어도 3만 명이 처형당할 뻔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 우리민족을 사랑하셔서 이들의 생명을 지키고 해방과 자유를 주셨습니다. 광명의 빛이 이 나라에 임한 것입니다. 마치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로의 애굽 왕과 바벨론의 통치 억압 속에서 그들이 신음하며 고통하고 부르짖을 때에 하나님께서 출애굽의 해방을 주셨듯이 말입니다.

 

광복절은 대한민국에 행하신 하나님의 출애굽 역사였고, 이스라엘을 70년 만에 바벨론에서 해방시킨 자유의 날이었습니다. 지난날 굴욕의 일제치하에서도 수많은 애국지사들은 독립운동을 했습니다. 191912105인 사건과 191931일 기미독립운동으로 인한 기독교의 박해는 가혹했습니다.

 

또한 제2차 세계대전의 발발과 함께 전쟁 말기에 교회 탄압은 실로 극심하였습니다. 주일날 근로강요, 성전에서의 예배시간의 제한, 함구령, 금족령, 강단에서의 성직자 추방으로 수많은 교회들은 문을 닫게 되었습니다. 특별히 신사참배 강요로 주기철, 손양원, 한상동 목사님을 비롯한 진리의 종들이 투옥되었습니다. 그들은 한국교회를 피의 복음으로 사수하면서 순교를 당했습니다. 청교도적 신앙에 뿌리박은 한국교회는 죄악의 가시밭에서 찢기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고난 속에서도 최후의 승리를 바라보면서 기독교인들은 일제에 항거하며 믿음으로 싸웠습니다.

 

신앙을 지키면서 순교의 피를 뿌림으로 한국 초대교회를 세우고 오늘의 한국교회를 만들었습니다. 참으로 1945815일이야말로 정치적으로 우리 민족이 일본 제국주의와 식민 통치에서 자유와 해방을 받은 날이요, 기독교에 있어서는 종교적으로 신앙의 자유를 얻은 20세기의 출애굽사건입니다.

 

광명의 빛이 이 민족과 나라에 임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아직도 우리나라는 지구상에 유일하게 남은 분단국가로서 남북이 나누어져서 전쟁상태를 벗어나지 못한 체 수많은 문제를 만들어 가고 있습니다. 그리고 북한의 핵문제는 이제 세계의 평화를 위협하는 문제로 확산되고 있습니다.

 

정치, 사회, 종교 등 사회 전반적으로 암흑의 권세가 이 땅을 뒤덮고 있는 실정입니다. 마치 희망이 사라진 역사의 암흑기와 다를 바 없습니다. 지금 우리 민족에게 필요한 갈망은 바로 하나님으로부터의 구원의 빛입니다. 지난날 1945815일 임한 광명이 또 다시 필요한 시기입니다.

 

일제시대 때 이상화 시인의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라는 시 중 한 구절이 떠오릅니다. 지금은 남의 땅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내 손에 호미를 쥐어 다오. 살진 젖가슴과 같은 부드러운 이 흙을/ 발목이 시도록 밟아도 보고, 좋은 땀조차 흘리고 싶다.

 

시인은 지난날 나라를 빼앗긴 절망적 상황 속에서도 끝내 찾아오고야 말 저 광복의 날을 꿈꾸고 있는 것을 봅니다. 그 봄이 오면 저 밭에 나가 땀 흘려 일하며 복된 나라를 세워보겠다는 꿈을 꾸고 있습니다. 바로 이 땅에 빛이 오기를 기다리는 마음입니다. 그렇습니다. 지금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이 나라 이 한반도 땅에 빛이 필요합니다. 주님으로부터의 광명이 필요합니다.

 

이스라엘은 예루살렘에 홀로코스트 추모관을 세웠습니다. 저들은 나치에 의해 600만이 대학살당한 사건을 홀로코스트라고 명명했습니다. 히브리어로 홀로코스트는 제물을 통째로 태워 바치는 번제를 뜻합니다. 그러니까 저들은 이 대학살 사건을 번제로 드려진 것으로 의미를 부여하고 있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번제로 바쳤으나 돌려받은 것처럼 유태인 대학살 때 이스라엘 백성들이 마치 번제처럼 바쳐졌으나 반드시 하나님으로부터 되돌려 받게 될 것을 굳게 믿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이라는 나라가 망한 것 같으나 그들은 다시 일어날 것을 믿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의미를 확실히 부여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야드 바셈 홀로코스트 추모관에 가면 정말 끔찍한 장면들을 볼 수 있습니다.

 

나치가 유대인들의 기름을 짜서 만든 비누며, 가스실, 생체실험실, 처참하게 죽어가는 장면들……. 유대인들은 이 장면을 보면서 눈물을 흘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이 추모관은 그것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거기 중요한 메시지를 남겨놓았습니다. “용서는 하지만 망각은 또 다른 방랑으로 가는 길이다.” 히틀러도 독일도 다 용서는 하자는 것입니다. 그러나 잊지는 말자는 것입니다. 또 다시 이런 수치와 아픔을 당하지 않도록 잊지 말자는 것입니다. 빛이 이스라엘에 임하기를 바라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종교개혁가 마틴 루터가 종교개혁을 일으키고 세상을 뒤바꾸어 놓을 수 있었던 것은 그가 로마서 117절을 만났기 때문입니다.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하는 그 말씀한마디가 그의 영혼을 뒤흔들어 놓았으며 마침내 종교개혁의 도화선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종교암흑기의 때를 새로운 광명의 때로 변화시켰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우리는 때의 중요성을 깨닫게 됩니다. 시기의 중요성입니다. 본문 11절에 너희가 이 시기를 알거니와 했습니다. 12절에는 밤이 깊고 낮이 가까왔으니라고 말했습니다. 본문에서 말하는 시기는 단순히 흘러가는 시간을 말하지 않습니다. 역사적 시간이 아닙니다.

 

희랍인들은 시간에 사용되는 두 가지 단어가 있습니다. 바로 크로노스카이로스시간입니다. ‘크로노스가 수평적인 시간이라면 카이로스는 수직적인 시간입니다. 크로노스는 자연적으로 흘러가는 시간이라면 카이로스는 의미가 부여된 시간입니다. 크로노스는 창세 이후로 만인에게 주어진 시간입니다. 일년 365일이라는 자연 질서 속에서 수평적으로 흐르는 시간입니다. 그러나 카이로스는 수직적으로 나의 삶에 의미를 주는 시간으로 내가 체험한 나의 시간입니다.

 

위대한 사람은 창조주가 주신 크로노스를 자신의 카이로스로 바꾸어 생에 아름다움을 창조해 갑니다. 바울은 지금 이 크로노스를 카이로스로 바꾸라고 말씀합니다. 인생에게는 두 가지 유형이 있습니다. 잠자는 인생은 크로노스 인생입니다. 그러나 깨어 있는 인생은 카이로스 인생입니다. 인류의 역사는 깨어있는 카이로스 인생이 만들어 갑니다. 하나님은 이 세상을 창조하시고, 우리로 하여금 다스리고 지배하고 정복하는 문화적 사명인 카이로스를 허락해주신 것입니다. 이러한 사명을 망각하고 세속적인 물결에 빠져 가서는 안 됩니다. 그래서 바울은 세월을 아끼라고 했습니다.

 

그저 흘러가는 크로노스의 시간을 구원의 시간인 카이로스로 바꾸라는 것입니다. 깨어 있는 자는 등에 기름을 준비한 지혜로운 자입니다. 본문에서 "자다가 깰 때"란 말은 "슬럼프에서 일어나라"는 말입니다. 여기서 슬럼프 상태는 의욕을 상실해서 완전히 자포자기한 상태를 두고 말합니다. 이러한 상태에서는 매사에 모든 것이 의미 없는 크로노스로 지나갑니다. 그러므로 일어나야 합니다. 우리는 카이로스로 바꾸어야 합니다. 지금도 늦지 않았습니다. 지금 이 순간에 일어나시기 바랍니다. 역사를 창조하는 카이로스적 인간이 되어야 합니다.

 

아프리카의 유명한 선교사 리빙스턴이 역사에 길이 남을 위대한 선교업적을 남길 수 있었던 이유도 마태복음 2820"내가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함께 있으리라" 라는 주님의 말씀이 그를 붙들었기 때문입니다. 그가 그 약속을 굳게 믿고 주어진 사명을 다함으로 아프리카 선교의 아버지가 되었던 것입니다. 카이로스적 인간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지난 날 존 뉴턴이라는 유명한 노예상인이 있었습니다. 아주 잔인하고 혹독하기로 유명했던 사람이 어떻게 목사가 되어 주님의 일을 하는 사역자가 될 수 있었던 아유도 말씀에 부딪혔기 때문입니다. "너희가 애급의 종 되었던 것과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를 구속하는 자임을 알라"는 신명기 1515절 말씀을 읽는 순간 그는 카이로스적 인간으로 변하게 되었습니다.

 

애급의 사슬에 갇혀 노예로 살아가는 이스라엘의 형편이 바로 자기 자신과 다를 바 없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구원자 되시는 하나님을 의지하고 말씀을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 그의 삶을 새롭게 변화시켜 나갔던 것입니다. 카이로스적 인간으로 변한 것입니다. 그가 말년에 지었던 찬송이 그 유명한 405"나 같은 죄인 살리신 그 은혜 놀라와"입니다.

 

고린도후서 46절에 이르기를 어두운데서 빛이 비취리라 하시던 그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 마음에 비취셨느니라라고 했습니다. 예수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빛이 우리와 이 민족에 임해야합니다. 영적으로는 우리 인간이 예수님을 믿기 전의 상태를 어두움이라고 말합니다. 죄라는 어두움에 갇혀서 꼼짝 못하는 상태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그 어둠에서 구원하시기 위해 그리고 우리를 의롭다 하시기 위해서 십자가 지시고 3일 만에 다시 살아 나셨습니다. 이 예수님을 믿는 자에게는 죄의 어두움에서 벗어나게 됩니다. 구원의 빛이 임했기 때문입니다.

 

본문 13절에 낮에와 같이 단정히 행하라고 말했습니다. 밝은 아침이 오고 있기 때문에 낮에와 같이 단정히 행하라는 말입니다. 지금은 밤이지만 이제 곧 낮이 올 것이니 낮에와 같이 단정히 행하라 어두운 가운데 젖어있지 말라고 했습니다. 밤의 일을 그대로 가지고 밤의 그 모습으로 아침을 맞이할 수는 없습니다. 지금은 밤이지만 아침이 가까이 오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낮에와 같이 단정히 행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카이로스적 인간이 되라는 말입니다.

 

미국의 축복의 모델 조나단 에드워드 목사는 5가지 결심을 하고 한 평생 지키면서 살았습니다. 첫째, 목숨이 붙어 있는 한 전력을 다해서 하나님의 뜻을 이룰 것이다. 둘째, 다른 사람을 깎아 내리거나 욕되게 하는 일을 절대로 하지 않는다. 셋째, 앙갚음을 하거나 혹 분하다고 해서 복수하려는 마음에서 하는 일은 절대로 하지 않는다. 넷째, 걱정거리로나 부끄러움으로 남을 일은 하지 않는다. 다섯째, 모든 시간을 창조적이고 건설적인 시간으로 보낸다고 작정했습니다. 카이로스적 인간이 되어 살겠다는 것입니다.

 

성경은 어두움의 일을 벗으라고 했습니다. 마치 옷을 벗듯이 어두움의 일 어두움에 관계된 것을 다 벗어버리고 빛의 갑옷을 입고 그리스도로 옷을 입으라고 했습니다. 빛의 사람이 되라는 말씀입니다. 카이로스적 인간이 되라는 말입니다. 빛이 임하면 카이로스적 인간이 됩니다. 빛이 임하여 빛의 사람이 될 때 어둠을 물리치는 새역사의 주인공이 될 수 있습니다. 이 나라와 민족에 하나님의 빛이 임하면 이 나라와 민족은 희망이 있습니다. 빛을 희망해야 합니다. 이 빛은 바로 복음의 빛입니다. 그러므로 나에게 먼저 이 빛이 임하여 빛의 사람으로 변화되어야 합니다.

 

성경은 말씀합니다. “너희가 전에는 어두움이더니 이제는 주 안에서 빛이라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 빛의 열매는 모든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에 있느니라”(5:8-9)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