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탄의 의미(요1:9~14)
목사 주태근 : 성탄절
‘내 마음의 풍금’이라는 영화가 있습니다. 시골학교 선생님을 짝사랑하는 초등학생 ‘홍연’이의 이야기를 그린 영화입니다. 동생들과 다툼하는 것이 하루일과의 전부였던 소녀는 어느 날, 줄넘기를 하며 정신없이 놀다가 빨래를 태워먹고 맙니다. 그 바람에 야단치는 엄마를 피해서 도망 나온 소녀는 마침 전근해 오시면서 길을 묻는 선생님을 처음 만나게 됩니다.
처음 대면하는 선생님께서 소녀에게 묻습니다. "아가씨! 여기 초등학교가 어디야?" 순간 '아가씨'라는 말을 처음 들은 홍연이는 선생님 얼굴도 바로 보지 못한 채 부끄러운 표정으로 초등학교 방향을 가리킵니다. 그리고 선생님이 사라진 후에야 혼자서 굵은 남자 목소리로 선생님 흉내를 내봅니다.
그 때부터 어리기만 했던 홍연이의 가슴에 선생님이 자리하기 시작하고, 고무줄 하던 친구들이 관심의 전부였던 어린 마음에 선생님에 대한 짝사랑이 싹트기 시작합니다. 그 이후로 철없던 홍연이가 '아가씨'로 성숙되어 갑니다. 선생님이 불러준 '아가씨'라는 말 한 마디가 동생들과 싸우기 만했던 철없던 한 초등학생의 가슴에 새로운 세계를 열어주었습니다.
어린 가슴에는 이전에 없었던 새로운 빛이 소녀에게 임하게 된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이런 경험은 어린 ‘홍연’이만 겪는 것이 아닙니다. 누구나 한 번쯤은 과거의 문을 닫고 새로운 세계의 문을 열어보게 되는 이런 빛을 누군가와의 만남을 통해 겪게 됩니다. 그리고 마음에 이런 빛이 비추어지면 그 사람 안에서는 새로운 변화가 시작됩니다.
사람은 인생을 살면서 수많은 만남을 참으로 다양한 만남을 갖게 됩니다. 그 가운데는 평생 잊혀지지 않는 만남도 있고 반대로 다시는 기억하고 싶지 않은 그런 만남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모든 만남 가운데 특별히 나를 변화시키는 만남, 나에게 마음의 빛을 던져주는 만남만이 참된 만남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누구에게나 이런 만남은 필요합니다.
어린 시절에만 이런 만남이 필요한 것은 아닙니다. 인생의 황혼기에서도 사람은 여전히 만남이 필요합니다. 노년에 이르러 비록 외형은 나약해 질지 몰라도 계속해서 변화를 추구하는 사람은 결코 노인이 아닙니다. 생기 넘치는 청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늙어서도 달라질 수 있다는 것은 늙지 않았다는 증거입니다. 내 나이가 지금 청년이든 중년이든 노년이든, 늘 변화를 추구하는 삶, 참된 만남을 바라보는 삶, 변화를 갈망하는 삶은 여전히 아름다운 삶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성탄절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우리 인간들에게 새로운 변화를 위한 새로운 만남의 체험입니다. 그것은 바로 인류의 구새주가 되신 예수 그리스도와의 만남입니다. 하나님은 요한복음 말씀을 통하여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참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취는 빛이 있었나니 그가 세상에 계셨으며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되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지 아니 하였으나”
예수님께서는 하늘의 보좌를 버리시고 이 땅에 오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것은 하늘의 생활이 무료하셔서 관광차 잠깐 다니러 오신 것이 아닙니다. 세상을 한 번 둘러보시고, 인간들이 어떻게 살고 있나 감독하시기 위해서 오신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만나러 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 그리고 오실 때에 그 안에 생명을 가지고 오셨습니다.
그리고 '그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고 성경은 아주 정확하고 자세하게 설명을 해 주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사람은 누구나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야 합니다. 그리고 그분께서 가지고 오신 그분 안에 있는 생명의 빛을 받아야만 합니다. 이 빛을 마음에 간직한 사람들은 모두가 다 세상을 변화시키는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이 빛의 능력을 아는 사람들은 불가능이 없는 사람들로 세상에 기억되었습니다. 이 빛을 의지하는 사람들은 세상이 감당할 수 없는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이 빛 속에 사는 사람들은 환난도 곤고도 핍박도,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도 감히 이길 수 없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 역시 이 빛을 받아야 합니다. 평생토록 이 빛에 비추임을 받으면서 살아 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 안에 있는, 이 빛을 받는 사람에게는 구체적으로 어떠한 역사가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까?
본문 말씀 1장 12절입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의 자녀로 다시 태어나는 은혜가 주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사람은 부모의 혈통을 따라서 태어나지만, 사람이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은 육적으로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영적으로 태어남으로 가능한 것입니다.
영적으로 태어난다고 하는 것은 인위적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 의해서 되는 것을 말합니다. 믿는 것은 내편에 관한 것이나, 영원한 생명과 축복은 하나님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영접하는 자'는 곧 믿는 자를 뜻합니다. 또한 '믿는 자'란 하나님을 인정하고, 그 삶 속에 그 분을 모시고 그 뜻대로 살려고 하는 사람을 말합니다.
이렇게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그 말씀을 따르고 순종하는 자를 그의 자녀로 삼으십니다. 일반적으로 사람은 좋은 환경과 고급스러운 문화적 삶을 추구하면서, 상류사회에 소속되기를 원합니다. 선진국의 영주권을 얻는 것, 좋은 대학에 입학하는 것, 좋은 직장에 입사하는 것, 좋은 배우자를 만나 결혼생활을 하는 것, 좋은 친구와 이웃 그리고 좋은 집과 쾌적한 환경을 원하고 또 그것을 얻기 위해서 최선의 노력을 합니다.
또한 어떤 사람이 다른 나라의 시민권을 받게 될 때에는 그가 그 나라의 국법을 준수하고, 그 나라의 국민의 의무를 다할 것을 반드시 서약해야 합니다. 부부는 미리 살아보고 상대방을 경험하지 않고, 어느 정도의 교제를 하고도 결혼 서약을 통하여 법적인 부부가 되어 가정생활을 영위하게 됩니다.
마찬가지로 성도가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그 말씀대로 살려고 약속하고, 하나님께 대한 헌신을 굳게 서약하고 그대로 따르면, 하나님은 그 사람을 당신의 자녀로 삼으시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그 자녀에게 더 좋은 것으로 풍성히 주시기 위함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말씀합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영화 '벤허'에서 보면, 벤허 유다는 노예 선으로 끌려 다니며 고역을 치르는 중에 대 해전을 맞게 됩니다. 그때 그는 로마의 함대 사령관을 구출해주고 그의 양자가 됩니다. 그는 양자가 되면서 고관대작의 아들로 그 지위와 권세를 한 몸에 안게 됩니다. 그는 노예의 신분에서 하루아침에 귀족의 신분으로 완전히 바뀌어 진 것입니다.
우리의 신분도 예수님을 만남으로 완전히 변화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은 하나님을 믿음으로 가능하고, 그 권세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순간부터 시작되는 것입니다. 특히 본문은 하나님의 자녀가 가지는 특권에 대하여 말씀해 주고 있는데, 특히 자녀는 부모의 권세와 부에 따른 상당한 특권을 누리게 됩니다.
그래서 왕이나 대통령의 자녀는 왕이나 대통령의 직책 때문에 그에 따른 호칭도 달라지고, 모든 삶에 특별한 예우를 받게 되는 것입니다.
지난 날 뉴스에 의하면, 미국에 사는 두 자매의 친아버지가 한국에서 작고한 재벌 회장이라고 발표한 적이 있습니다. 죽은 회장의 아들의 혈액을 뽑아서 유전자 감식결과를 근거로 하여, 재판부는 두 자매가 제출한 친권자 확인청구소송에서 그 자매에게 승소 판결을 내렸습니다.
이에 그들은 죽은 회장의 호적에 오르게 되었고, 그들도 유산을 최소한 수 십 억씩 받게 된다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것은 믿는 순간 큰 특권을 얻게 되는 영광을 갖게 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또한 하나님의 자녀는 하나님을 영접하는 순간 즉각적으로 이루어지지만, 자녀다운 아름다운 모습이 되는 것은 점차적인 과정을 통하여 이루어집니다.
그렇다고 해서 하나님의 자녀인 것이 불확실한 것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합법적인 '권세'를 이미 부여받았기 때문입니다. 즉, 성도가 아직 완성되지는 않았으나 하나님의 자녀임을 주장할 수 있는 합법적인 자격을 이미 우리 주님으로부터 부여받은 것입니다
성탄절은 예수님을 만나는 절기이며 예수님을 구세주로 믿어 하나님의 자녀로 다시 태어나는 절기 입니다. 이제 하나님의 자녀가 된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겠습니까? 매년 성탄절을 습관적으로 맞이하는 우리들은 주님이 이 세상에서 보내셨던 정신과 자세로 성탄을 보내야할 것입니다.
몇 년 전 국민일보에 ‘생면부지의 청년에게 신장을 기증한 어느 목사님의 이야기’가 기사화 되어 실린 적이 있습니다. 부모만 있고 형제가 없는 어느 청년이 신부전증으로 고통을 당하고 있었습니다.
그 형편을 알게 된 주문진에 있는 그 청년의 고향 출신 교회에서는 교회에 출석하지 않는 그 청년의 부모에게 “수술비는 교회에서 마련할 테니 부모가 조직 검사를 받고 아들과 조직이 일치하는 사람이 신장을 아들에게 이식시키도록 합시다.”라고 말했는데, 그 이야기를 들은 부모는 온다 간다 말도 없이 슬그머니 자리를 피해 버렸습니다.
그리고 이후 연락을 끊어 버렸습니다. 그런 부모의 모습을 보고 그 교회의 목사는 충격을 받았습니다. 부모까지도 자식을 위해 희생하려 하지 않는 이 세상의 삭막함에 놀랐습니다. 그리고 목사로 부름 받아 목사가 되었음에도 목사답게 그동안 사랑을 실천하며 살지 못했던 자신을 회개하고 부모가 못 베풀어주는 사랑을 대신 베풀어주기로 결심했습니다.
그 결심대로 그 목사님은 주일 예배 후 서울에서 열리는 세미나에 참석한다고 서울로 올라와서는 바로 청년이 입원해있는 한양대학병원에 입원하여 조직검사를 받고, 다행히 조직이 일치한다는 말에 즉시 자기교회 출신이지만 자기가 부임했을 때에는 그 청년이 고향을 떠났었기에 그동안 서로 얼굴 한번 마주 대한 적이 없는 그 청년에게 자신의 신장을 이식시켜 주었습니다.
수술이 무사히 끝난 다음, 그 목사님과 청년은 서로의 손을 잡고 ‘우리의 남은 생애, 주님을 위해 열심히 삽시다.’ 라고 눈물을 흘리며 약속했습니다. 그 목사님이 주문진 성결교회의 목사님인데 그 은밀한 수고가 알려진 다음 그 목사님은 그를 취재하러간 기자에게 부끄러운 듯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동안 내가 사랑하며 살지 못한 것에 대해 몸으로 드린 회개 기도일 뿐입니다.”
우리 하나님은 이 세상을 구원하시기 위해, 아니 바로 나를 구원하시기 위해 신장 하나 정도를 주신 것이 아니라 바로 하나님 자신이신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님을 저주받아야 할, 그리고 망해야 마땅할 이 세상에 보내 주셨습니다. 그리고 이 세상에 인간으로 오신 하나님이신 예수님은 십자가 위에서 자신의 전부를 다 주어 세상과 우리의 죄 값을 대신 치러주시고 죽으셨습니다. 그의 몸, 그의 전부를 바쳐 나를 구원하시고 세상에 구원의 길을 열어 놓으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위해 인간이 되셨고, 인간이 되신 하나님이 나의 죄 값을 대신 치러주시고 죽으셨다는 이 감동적인 사랑 이야기는 진정 하늘을 두루마리 삼고 바다를 먹물 삼아도 다 기록할 수 없는 사랑이야기이고 만 입이 내게 있어도 다 표현할 수 없는 사랑이야기 입니다.
성탄절은 자기 백성을 죄에서 구원하시기 위하여 하나님이 이 세상에 오신 날입니다. 왜 하나님이 사람이 되어 오셨습니까? 한마디로 인류의 죄를 속죄하시기 위하여 오셨습니다. 마 1:21절에는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고 하였습니다.
마가복음 10장 45절에는 "인자의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 인간 편에서 볼 때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신 가장 큰 이유는 인간의 죄 문제를 해결하시기 위함임을 알 수 있습니다.
죄 문제가 아니라면 굳이 하늘 영광을 내 놓으시고 낮고 천한 이 땅위에 오셔서 십자가의 고통을 지실 필요가 있겠습니까? 인간의 속죄의 필요성을 너무나 잘 알고 계신 하나님은 인간의 죄를 속죄하기 위하여 성탄절에 육신의 몸을 입으시고 이 세상에 오신 것입니다.
성탄절은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인류에게 주시기 위하여 오신 날입니다. 그가 오심은 인류의 죄악을 속하시고 구원하시기 위하여 오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 인생들을 하나님의 자녀로 삼기 위해 이 세상에 오신 것입니다. 동시에 하나님의 자녀로서 복을 누리게 하기 위함입니다.
하나님께서 독생자까지 아낌없이 우리를 위하여 보내주신 것은 천하를 다 허락해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들을 위하여 필요한 것은 아낌없이 모든 것을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들의 생명이 풍성하기를 위하여 예수님을 보내 주셨습니다. 성탄은 하나님께서 인류에게 가장 큰 선물을 허락한 축복의 날입니다.
주님은 이 성탄절에 우리들 모두에게 찾아 오셔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도적이 오는 것은 도적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요10:10)
아멘.
성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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