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울서신 설교원고

속사람을 건강하게(엡3장14절~19절)

주 바나바 2023. 5. 30. 11:39

속사람을 건강하게(314~19)

 

아랍에미리트 아부다비 원전공사 현장 바라카교회

목사 주태근

 

어느 농부와 머슴이 밭에서 일하면서 아내가 가져올 새참 식사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정 시간보다 한 시간쯤 늦게 온 아내가 음식함지를 내려놓고는 몹시 슬픈 얼굴을 하고 있었습니다. 무슨 일이 있었느냐고 남편이 물어보아도 여자는 눈물만 흘리고 있을 뿐 사연을 말하지를 않습니다.

 

그날 밤에 남편이 아내가 울었던 사연을 다시 물어보았을 때도, 그녀는 별일 아니라면서 그저 슬픈 꿈을 꾸었다고만 대답합니다. 사연인즉 이러했습니다. 그 여인은 평소처럼 약주와 음식을 장만하여 남편이 일하고 있는 곳으로 막 떠나려는 참이었는데 갑자기 춘곤증이 밀려오는지라 마루에서 잠깐 누웠다가 간다는 것이 그만 깜빡 낮잠이 들고 말았습니다.

 

그 때, 말울음소리가 들리더니 하늘에서 백마를 탄 준수한 청년이 부인에게로 다가와서, 자기는 하늘나라의 왕자인데 1년 전에 사랑하는 아내를 사별하고 아내와 똑같이 생긴 여자를 구하러 다니는 중에 오늘 바로 그에 해당하는 사람이 그 여인인지라 모시러 왔다는 것입니다.

 

이 멋진 천국 왕자의 말에 정신이 산란하여진 여인은, 그러나 자기가 농부의 아내요 자식이 둘이나 있고 또한 피부가 거칠고 못생긴 촌뜨기인 만큼 도저히 그럴 자격이 없다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왕자는, 그건 이 세상의 겉 사람의 모습일 뿐이고 자기 나라 기준에서 보면 아름다운 여인이요, 왕비의 자태이니 같이 가서 살자고 하면서 당장 함께 백마에 태우고는 하늘로 솟아오르는데 그 신나고 신기하기가 이루 말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천국에서 십 년 동안 왕비로서 멋지게 사는데 이남일녀를 낳아 길렀습니다. 이 세상에서 농촌 여인으로 지낸 일들은 까마득히 잊어버리고 화려하고 아름다운 새 생활에 익숙해 있던 어느 여름 날, 나무에 앉은 제비 한 마리가 짹짹 소리를 내며 땅에 떨어지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 제비 소리에 놀라 눈을 떠보니 정말 제비들이 자기가 누워있는 집의 처마에서 지지배배 울고 있습니다. 여인은 너무나 깜짝 놀랐습니다. 십 년간 정든 나라의 남편과 자식들을 불러 보았으나 흔적도 없습니다. 슬픔과 충격이 너무나 커서 기절할 지경입니다. 그래서 하염없이 눈물만 흐릅니다.

 

그 짧은 반시간의 낮잠 속에서 한사람으로서 두 사람의 인생을 경험했습니다. 겉사람의 육신의 삶과 속사람의 꿈속에서의 삶입니다. 농부의 아내가 낮잠을 잤던 반시간 동안의 겉사람은 마루에 누워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여인의 속사람은 꿈속에서 십 년간이나 하늘나라에 가서 왕비로 지냈습니다.

 

인간은 겉 사람과 속사람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대개 그리스도인들은 사람의 구성요소에 대해서 말할 때 육체와 영혼으로 구분합니다. 바로 겉사람과 속사람으로서의 인간입니다.

 

자신이 라고 우기는 어떤 청년이 있었습니다. 그를 치료하는 의사당신은 쥐가 아니고 사람입니다라고 말을 해도 여전히 그는아닙니다.” “나는 바로 쥐입니다.를 반복하기만 합니다. 어느 날 의사는 어떤 방법을 찾아냈습니다. 그리고 의사는 그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맞습니다. 당신은 과거에 쥐였습니다. 그러한 사실을 깨달은 사람을 찾아보기 쉽지 않는데 그것을 깨닫고 있다니 당신은 참으로 대단한 사람이군요.” “그러나 이제 당신은 더 이상 쥐가 아니랍니다. 당신은 변화가 되었어요. 당신은 사람입니다.

 

이 말을 들은 청년은 내가 드디어 의 생활을 청산하고 사람이 되었노라 만세를 불렀습니다. 그리고 그 청년은 휘파람을 불며 병원 문을 나섰습니다. 잠시 후 우당탕한 소리와 함께 그 청년의사의 방문을 열고 급하게 들어왔습니다. 그리고 벌벌 떨면서 입을 떼었습니다. “선생님! 병원 문 앞에 고양이 한 마리가 있어요. 무서워요!이런 소리를 들은 의사가 다시 말합니다. “그게 무슨 문제지요. 당신은 이제 더 이상 쥐가 아니라 사람이랍니다. 쥐를 무서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참으로 우스운 이야기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인간들에게 주는 의미가 큽니다. 인간들의 육체 즉 겉사람이 건강해야 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러나 앞서서 인간에게는 속사람의 건강도 필요하다는 사실입니다. 속사람이 건강해야 겉사람 역시 건강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1949년에 설립된 세계보건기구(WHO)의 창립헌장에 건강하고 행복한 삶이 무엇인가?”를 이렇게 정의했습니다. “육체적 질병 뿐 아니라 정신적, 사회적 질병이 없는 온전한 상태가 건강하고 행복한 삶이다."

 

그런데 여기에다 1998WHO 집행이사회에서는 하나 더 첨가하였는데, 영적인 것(Spiritual)을 첨가시켰습니다. 그래서 건강한 삶이란 신체적이고, 정신적이고, 사회적이고, 영적으로 건강해야 참 웰빙 이라는 것입니다. 겉사람의 건강이 소중하지만 영적으로 건강해야 참된 행복이라는 말입니다.

 

언젠가 국정홍보처에서 국민의식 및 가치관에 관한 설문 조사를 한 적이 있습니다. 그때 우리나라 국민들의 가장 큰 관심사가 육체의 건강 문제인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육체건강을 제1의 관심사라고 응답한 사람이 무려 전체의 83.3%나 됐습니다. 굳이 이런 설문 조사의 통계를 인용하지 않더라도 오늘날 현대인들의 최대 관심사가 건강이라는 데에는 이의가 없을 겁니다.

 

사실 건강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침이 없습니다. 문제는 도에 지나치는 경우가 많다는 점입니다. 특히 우리 한국 사람들은 건강에 관해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정도로 열심이 대단합니다. 몸에 좋다, 건강에 좋다고만 하면 무엇이든 닥치는 대로 사 먹습니다. 심지어는 해외까지 진출합니다.

 

멀리 알래스카에 가서는 녹용이나 웅담을 구한답시고 사슴이나 곰 같은 야생 동물을 마구 해치는 일이 있다고 말합니다. 태국에 가서는 뱀을 잡아 먹고, 아프리카까지 가서는 코뿔소를 잡아먹기도 합니다. 그렇게 해서 얼마나 건강 장수할지 모르지만 건강에 대한 욕망이 참으로 대단합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모르는 게 하나있습니다. 인간은 육체와 영혼으로 되어 있고, 육체보다 더 중요한 게 영혼의 건강이라는 점입니다. 인간들이 이런 사실을 모르고 살다 보니까 육체는 건강하면서도 결코 행복한 인생을 살지 못합니다. 멀쩡한 육체를 갖고 사악한 인생을 살아갑니다.

 

아무리 육체가 건강해도 그 영혼이 건강하지 못하면 인간은 별 수 없습니다. 인간은 육신의 건강 이상으로 영혼의 건강을 지키고 관리해야 합니다. 겉사람의 건강만큼 속사람의 건강이 중요합니다. 주님은 일찍이 깨우쳤습니다.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말씀으로 살 것이라”(4:4) 속사람의 건강입니다.

 

특별히 오늘의 성경말씀은 속사람의 건강에 대하여 구체적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본문 16절입니다. "성령으로 말미암아 너희 속사람을 능력으로 강건하게 하옵시며" 겉사람 만큼 속사람이 건강해야 하는데 속사람의 건강은 '오직 성령으로'이루어 진다는 것입니다. 성령의 능력을 공급받을 때에 속사람이 건강하다는 것입니다. 본문은 계속해서 말씀합니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너희 마음에 계시게 하옵시고(17)" 우리의 속사람이 건강하기 위해서는 그리스도께서 우리 마음 안에 항상 계셔야합니다. 예수님과의 연합입니다. 예수님과의 연합은 성령님을 통해서 이루어집니다. 십자가 중심적인 신앙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가 항상 우리 안에 살아 계셔야합니다. 이것을 가능케 함은 바로 성령님이 역사입니다.

 

여기서 '계시다' '거한다.'라는 말은 헬라어에 두 단어가 있는데 하나는 '파로이케오'로 이것은 천막을 친다는 뜻이며 임시적으로 나그네가 거한다는 뜻입니다. 또 하나의 용어는 '카도이케오' 라는 말입니다. 이 말은 영구 거주를 말합니다. ‘영원히 거하심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말하는 계시다는 말은 바로 이 카도이케오를 말합니다. 주께서 우리 마음에 영원히 거주해 계셔야 됩니다. 성령님의 내주하심의 역사입니다. 그래서 그가 주인이 되시고, 그가 목적이 되시고, 그가 주도하시고 이끄셔야 됩니다. 성령임의 내주하심으로 그리스도가 내 마음을 다스릴 때에 인간이 건강하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속사람의 건강입니다.

 

중국 동부의 한 농부가 자신의 농장에 대나무를 심고서 기다렸습니다. 첫 해에는 아무것도 올라오지 않았습니다. 두 번째 해에도 역시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세 번째, 네 번째 해에도 마찬가지였습니다. 하지만 다섯 번째 해가 되었을 때 수백 평방미터의 땅 밑에서 대나무 뿌리가 빽빽이 퍼져 있었고, 마침내 헤아릴 수조차 없는 수많은 대나무 싹들이 지면을 뚫고 올라오기 시작했습니다. 마치 마술을 보는 것 같았습니다.

 

대나무들은 하루에 한 자가 넘게 자랐습니다. 불과 여섯 주 만에 대나무들은 15미터 이상씩 키가 커졌습니다. 그래서 농부는 대나무들을 잘라다 팔아 큰 부자가 되었습니다. 사실 그것은 마술이 아닙니다. 이 대나무는 중국 동부에 자라는 것으로 `모소'라는 이름을 갖고 있으며, 싹을 내기 전에 뿌리가 사방 수십 미터까지 뻗어갑니다. 그래서 일단 싹을 내면 뿌리에서 보내주는 거대한 양의 자양분 덕분에 순식간에 키가 자라는 것입니다.

 

5 이라는 기간은 뿌리를 내리기 위한 준비 기간입니다. 한 인격의 겉사람속사람을 나무에 비유하면, 표면에 드러난 나무의 줄기와 잎, 열매를 겉사람으로, 땅 속에 숨겨진 뿌리 부분을 속사람에 비유할 수 있습니다. 표면에 드러난 나무의 형태가 싱싱하고 우람한 것일 때, 역시 보이지 않는 뿌리가 건실한 것입니다. 그러한 나무를 가리켜 잘 자란 나무라고 말합니다.

나무의 줄기가 마르고 잎이 누렇게 된 나무는 잘 자라지 못한 것입니다. 사람의 인격에 있어서도 그와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의 삶은 우리 자신을 표현함으로써 성장하게 됩니다. 우리의 삶의 표현은 우리의 속사람이 자람과 함께 그 표현이 달라집니다. 삶의 표현 속에서 삶은 상승하게 되고 자기를 정돈하고 자기를 전개시켜가게 됩니다. 우리의 삶의 표현에는 언어적 표현이 있는가 하면, 행동을 통한 표현, 신체의 태도를 통한 표현, 얼굴의 표정과 손의 움직임을 통한 표현이 있습니다. 이러한 표현들은 속사람의 상태와 깊은 연관을 갖고 있습니다.

 

실제로 나무를 자라게 하는 것은 토양이나 그 뿌리가 아닙니다. 보이지 않는 어떤 생명력이 나무를 자라게 합니다. 우리의 속사람을 자라게 하는 것도 그 어떤 생명력입니다. 본문에서 그 생명력이 바로 성령의 능력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성령님은 생명의 영이십니다.

 

생명의 영이신 성령님을 통해서 흘러나오는 그 생명의 흐름이 우리의 속사람을 자라게 합니다. 그러므로 인간은 성령으로 거듭나야합니다. 우리의 속사람이 자라지 못하는 여러 가지 방해물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 근원은 역시 죄의 힘입니다. 성령님의 능력은 그 죄의 힘에서 우리의 속사람을 해방시키고, 치유하시어 정상적으로 자라게 하십니다.

 

성령님의 능력으로 속사람이 자랄 때 그 사람이 겉사람을 통해서 삶으로 표현됩니다. 언어적 표현이 달라지고, 행동의 표현이 달라집니다. 그리고 신체의 태도를 통한 표현, 얼굴의 표정, 손의 움직임을 통한 표현이 그 전과는 다릅니다. 그 때 그러한 삶의 표현을 하는 사람을 보고 신앙적으로 많이 자랐다고 말합니다. 이것이 속사람이 강건해졌다는 의미입니다.

 

성령의 능력으로 속사람이 자라지 않을 때 우리의 삶의 표현은 주로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12:16)에 매여 있는 가운데서 삶의 표현이 이루어집니다. 그렇지 않고 종교적일 때 철저한 금욕주의와 고행으로 억제된 삶의 표현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삶의 표현에는 생명력이 없습니다. 우리 인간에게 중요한 것은 영을 살리는 성령의 능력입니다.

 

지난 날 유대교의 율법학자 도브베어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아주 특별한 사람이었습니다. 사람들은 그가 나타나면 겁을 집어먹었습니다. 그는 교리에 정통했고 신학적인 면에서는 한 치의 타협도 하지 않는 탈무드 학자였습니다. 그리고 그는 절대로 웃는 법이 없었습니다.

 

그는 철저한 금욕과 고행의 신봉주의자였습니다. 마침내 그는 지나친 고행으로 병이 들었으나 어떤 의사도 그의 병을 고치지 못했습니다. 누군가 그에게 하시디즘의 창시자며 신비학파며, 가슴의 신앙에 기초한 새로운 종교 운동을 일으킨 바알 셈토브를 만나보라고 권면했습니다.

 

바알 셈에 대해 이단이라고 거부감을 갖고 있던 도브베어는 처음에는 망설였으나 그가 병을 치료하는 기적을 행한다는 주위의 권유로 그를 만나기로 마음먹었습니다. 어느 날 자정이 지나서 바알 셈도브베어 방에 나타났습니다. 바알 셈은 곧장 방안으로 들어와 도브 베어의 손에 성경책을 쥐어주고 큰 소리로 읽으라고 말했습니다.

 

도브베어가 성경책을 읽어 내려가는 도중에 바알 셈이 갑자기 그 읽는 것을 중단시켰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당신에게는 무엇인가가 빠져 있습니다. 당신의 신앙에는 중요한 것이 빠져 있습니다.그 때 병자인 도브베어가 물었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바알 셈이 대답합니다. “그것은 영혼입니다. 당신에게는 영혼이 빠져 있습니다.

 

영혼이 없기에 육이 병들었다는 가르침이었습니다. 즉 속사람이 죽었기에 겉사람이 병들었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영이 죽어 있는 상태에서 이루어지는 삶의 표현은 아무런 능력을 나타낼 수 없습니다. 죽은 인생입니다. 우리는 그동안 겉사람의 건강만이 살길이고 행복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겉사람의 건강위해 좋은 약도 사먹고, 건강음식도 섭취하고, 육체 건강을 위해 규칙적인 운동을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속사람의 건강에 대하여 무관심의 인생을 살아 왔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의 속사람이 약해집니다. 약해진 속사람이 병듭니다. 결국 생명력을 상실합니다. 겉사람과 속사람이 함께 병이 듭니다.

 

속사람이 깨어나야 합니다. 속사람이 회복되어야 합니다. 속사람이 생명력이 있어야 합니다. 성령님의 능력으로 속사람 즉 영혼이 깨어나서 살아있는 영으로 될 때 건강한 인생으로 거듭나게 됩니다. 인생은 육과 영이 함께하는 인생입니다. 육만이 인생이 아닙니다. 육과 영이 함께하는 인생입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바울을 통하여 이렇게 말씀합니다.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그들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8:9.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