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기 및 기념 예배 설교

부활의 능력(눅24:1-6) : 글-주태근

주 바나바 2024. 1. 27. 10:35

부활의 능력(24:1-6)

 

이스라엘 그리스도의 정원 무덤

주태근/부활절

 

피조물은 자기 나름대로 힘(energy)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 힘으로 자기의 생명을 유지합니다. 자손을 번성시킵니다. 하루살이에서 독수리에 이르기까지 자기가 지니고 있는 에너지로 날갯짓을 하면서 하늘을 날고 생을 유지합니다. 쥐벼룩에서 아프리카의 초원을 누비는 수천마리씩의 루우나, 얼룩말, 맹수들도 선천적으로 물려받은 에너지를 활용하여 번식하고 살아갑니다. 에너지가 고갈되는 날에 그들의 생명도 끝나게 됩니다.

 

태양계에서 가장 강력한 에너지를 가지고 있는 태양은 지구처럼 고체의 껍질을 가진 것이 아닙니다. 전체가 거대한 고온의 기체의 둥근 공으로 되어 있습니다. 태양의 기체를 이루는 원소는 그 대부분이 수소(H), 다음이 헬륨 (He)이고, 이 밖에 극히 적은 양의 나트륨(Na), 마그네슘(Mg), (Fe) 등 지구상에서 알려진 원소 약 70여종이 기체 상태로 존재합니다.

 

현재 태양의 중심부는 온도 1500, 압력은 약 30ATM인 초고온, 초고압의 기체로 이루어졌고, 가장 많이 있는 수소의 원자핵이 충돌해서 열핵융합반응을 일으켜, 수소의 원자핵 4개가 헬륨의 원자핵으로 뭉치고, 이 때 질량의 0.7 %가 소실하여 에너지로 바뀌는 원리로, 태양이 매초 방출하는 방대한 에너지를 생산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태양은 창조 이래 지금까지 절반의 에너지가 소실되었습니다. 몇 천 년 동안은 걱정하지 않아도 될듯합니다. 성경 요한계시록의 최후의 심판 때나 그 에너지가 다 소실되리라 그렇게 믿습니다. 인간이 만들어 낸 핵무기는 작은 태양이라고 생각하면 틀림이 없습니다. 태양에 비하면 핵무기는 작은 먼지 태양에 불과하지만 그러나 그 위력은 가공할 만합니다.

 

핵무기 몇 개만 던지면 지구 덩어리가 끝장이 납니다. 이렇게 우주 만물은 각자가 지니고 있는 에너지가 있습니다. 그것을 우리는 자연적인 에너지(Natural Energy)라고 말합니다. 자연적인 에너지는 자연의 세계를 유지합니다. 그러나 이 우주 안에는 또 다른 세계가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그 세계를 3층천이라고 믿었습니다. 바울은 그 3층천에 다녀왔다고 고백합니다. 우리는 그 세계를 신의 세계, 즉 하늘나라 천국이라고 말합니다. 신의 세계는 초자연의 세계입니다. 초자연의 세계에는 초자연적인 힘(Supernatural energy)이 존재하고 있습니다. 오늘은 주님이 부활하신 부활주일입니다. 주님의 부활 이것은 어디에 속하는 세계입니까?

 

부활의 능력은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하나님의 능력은 초자연적인 힘에 속합니다. 부활의 능력은 살리는 능력입니다. 소생하는 능력입니다. 성공하는 능력입니다. 잘 되는 능력입니다. 생명의 능력입니다. 절대자의 능력입니다.

 

안식 후 첫날 이른 아침 아직 어두울 때에 막달라 마리아가 예수님의 무덤을 찾아 갔습니다. 누가복음에는 여자들이 예비한 향품을 가지고 갔다고 기록했습니다. 그 여자들은 막달라 마리아, 요안나, 야고보의 모친 마리아, 또 저희와 함께 한 다른 여자들”(24:10)이라고 말했습니다.

 

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던 30대의 젊은 선생님이 폐병 3기 진단을 받은 선생님이 있었습니다. 이 절망적인 상황에서 그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곤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마지막으로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 것밖에 없었습니다. ‘하나님, 나를 불쌍히 여겨 주시옵소서. 병에서 고쳐 주시옵소서.’

 

정말 간절히 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기도를 하다 보니 나는 죽지 않고 꼭 살아날 것 같은 믿음이 생겼습니다. 그러나 설령 죽는다 하더라도 죽는 순간까지는 열심히 살겠다는 마음을 먹었습니다. 그는 피를 토하고 쓰러지면서도 학교 근무는 물론, 계속 새벽 기도를 나갔습니다.

 

성가대 지휘도 했습니다. 교회학교 교사도 열심을 다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기도를 하다가 꿈을 꾸었습니다. 앙상한 나무가 잎이 생기더니 점점 커져서 정자나무처럼 우람한 큰 나무로 회생하는 모습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런 꿈을 꾸고 나서 그는 하나님이 나를 고쳐 주셨나 보다.’라고 생각이 들었습니다. 앙상한 나무처럼 폐병에 걸린 자신의 모습인데, 하나님께서 이제 자신을 우람한 나무처럼 만들어 주실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대학병원에 찾아가서 엑스레이 검진을 한 결과, 폐가 석회화 되어 치료되었다는 통보를 받게 되었습니다. 얼마나 기뻐했겠습니까? 이것이 부활의 능력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으심은 우리들의 고난을 담당하심입니다. 그리고 주님의 부활은 새로운 삶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부활은 죽었던 사람이 다시 살아난다는 말입니다. 예수님께서 죽으셨다가 다시 살아 나셨다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기독교의 핵심은 부활 신앙에 있습니다. 부활은 믿어도 되고 안 믿어도 되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기독교에서 부활을 빼면 기독교는 없어집니다. 기독교의 골자는 부활입니다. 부활 없는 기독교는 기독교가 아닙니다. 부활을 믿지 못하는 기독교인도 기독교인이 되지 못 합니다.

 

인도의 선교사 썬다싱이 영국을 방문했을 때의 일입니다. 대학교수 한 분이 질문을 던졌습니다. “당신이 오래 동안 젖은 전통의 힌두교를 버리고 기독교를 믿게 된 이유가 무엇이냐?”라고 물었습니다. 즉 힌두교와 기독교의 차이가 무엇이기에 기독교를 택하게 되었느냐? 라고 묻자, 그는 부활하신 예수님이 살아 있기 때문이라고 간단하게 대답했습니다.

 

부활은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아주 특별한일입니다. 하나님만이 하시는 능력입니다. 스위스의 유명한 철학자 칼 바르트는 부활,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가 능력을 가지신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선언한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1:4입니다. “성결의 영으로는 죽은 가운데서 부활하여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되셨으니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시니라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은 건강이나 평안이나 물질의 복을 얻기 위함만이 아닙니다. 그보다 더 궁극적인 이유는 부활의 능력을 알기위해서입니다. 고난당하고 죽으셨다가 부활하신 예수님처럼 부활의 능력을 덧입기 위해서입니다. 죄로 죽었던 인생에게 있어서 무엇이 소망스럽겠습니까?

 

세상의 것을 아무리 가진다고 한들 우리들이 만족할 수 있겠습니까? 시간이 지나면 모두 사라져 버릴 것들입니다. 그러나 부활은 영원합니다. 죽어도 다시 사는 부활의 능력으로 영생한다면 이보다 더 좋은 것은 없습니다. 사람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죽음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쉽게 생각합니다.

 

죽으면 그만이라고그러나 죽은 다음에는 심판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천국과 지옥에서 영원히 사는 삶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인정하든 하지 않던 간에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아들로 시인하고 그를 구세주로 믿으면 죽어도 다시 사는 부활의 능력을 얻습니다. 이 부활로 인하여 현재의 우리는 의미 있는 삶을 살고 있는 것입니다.

 

A. M Ramsay 라고 하는 사람은 우리 주님의 부활을 가리켜서 이런 말을 했습니다. “신약시대의 그리스도인들에게 부활이 없었다면 기독교의 복음은 결론이 없는 복음이 되었을 것이다. 아니 그것은 전혀 복음이 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렇습니다. 이 말에 우리는 모두 전적으로 동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주님의 부활은 예수님의 생애의 절정이며 우리 기독교의 하이라이트입니다.

 

기독교의 모든 신학과 교리는 사실상 이 부활신학의 서론에 불과합니다. 기독교의 모든 역사는 사실상 이 부활을 증명하고 전하기 위해 존재한다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주님의 부활은 기독교 복음의 위대한 결론이며 사탄과의 전쟁을 마무리 짓는 위대한 승리입니다. 나가서 우리 주님의 부활은 인간의 극한 슬픔을 이기는 위로의 능력이며 모든 절망을 짓부수는 소망의 능력이며 죽음을 정복하는 생명의 능력입니다.

 

주님의 부활 앞에 그 어떤 절망과 낙심도 별것이 아니며 주님의 부활 앞에 죽음의 한계상황도 태양 앞에 스러지는 한 줌 안개 같은 존재일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의 능력이 우리와 함께 하는 한 우리를 이길 자 없으며 우리를 해할 자 없습니다.

 

그 어떤 슬픔이나 절망도, 죽음까지도 우리의 적수가 되지 못합니다. 이 위대한 부활의 소망과 감격이 우리 성도 여러분과 가정위에 넘쳐 나시기를 다시금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옛날 아라비아의 왕이 꿈을 꾸었습니다. 꿈속에 죽음의 신이 다가오더니 오늘 해가 지기 전에 너를 데리러 오겠다고 말했습니다. 잠에서 깬 왕은 불안해서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하루에 천리를 달린다는 말을 타고 죽음의 신이 쫓아오지 못하는 곳까지 도망을 가리라 다짐하고 이른 새벽 떠났습니다. 천리를 달려 어느 마을 느티나무 밑에 도착했습니다.

 

이젠 왕궁에서 천리나 떨어져 있으니 설마 여기까지야 죽음의 신이 나를 데리러 오지 못하겠지 하고 숨을 돌리려고 말에서 내렸습니다. 그랬더니 그 느티나무 뒤에서 죽음의 신이 나타나더니 여기까지 오느라고 수고했소?”라며 섬뜩한 미소를 짓는 것이었습니다.

 

기절초풍을 한 왕이 도대체 어찌된 영문이냐고 따졌습니다. 나를 왕궁으로 데리러 온다더니 어떻게 여기까지 왔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그 죽음의 신이 대답합니다. “원래 당신을 여기서 만나기로 약속이 되어 있어서 조금 먼저 와서 기다린 것뿐이라?”라고 말입니다.

 

또 하나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떤 마을에 세 친구가 살고 있었습니다. 어느 날 공교롭게도 세 친구가 함께 죽게 되었습니다. 세 사람은 모두 염라대왕 앞으로 갔습니다. 염라대왕이 망자의 명부를 뒤적이더니 부하에게 야단을 칩니다. 이 사람들은 지금 올 사람들이 아닌데 어떻게 된 것이냐? 라고 물었습니다. 부하들이 장부를 뒤적이더니 하는 말이 행정착오로 잘못 온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염라대왕도 체면이 있던지 부하의 사무착오를 사과하더니 실수한 대가로 소원을 하나씩 들어주겠다고 말했습니다.

 

첫째 친구는 다시 이승에 가면 부자로 살게 해달라고 했습니다. 둘째 친구는 큰 벼슬을 하게 해달라고 주문했습니다. 염라대왕은 좋다고 허락했습니다. 셋째 친구가 희망 사항을 말합니다. 나는 부자가 되는 것도 싫고 벼슬도 싫습니다. 가난해도 좋으니 경치 좋은 곳에서 사랑하는 사람과 죽지 않고 오래오래 살 수 있게 해달라고 말했습니다. 그 순간 염라대왕이 갑자기 험악한 인상을 짓더니 예끼 이놈아! 그런 데가 있으면 내가 가서 살지. ! 여기서 염라대왕 노릇하고 있겠느냐?” 그러더랍니다.

 

그렇습니다. 죽음은 피할 수없는 것입니다. 아무도 정복할 수 없는 요새입니다. 그러므로 인간 자체의 힘으로는 죽음의 신을 피할 길이 없습니다. 그러나 이 시간 우리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봅시다. 다시 사신 부활의 주님을 바라보십시다. 주님 안에 부활의 능력이 있습니다. 죽음을 정복하는 능력이 있습니다. 죽어도 다시 사는 생명이 있습니다.

 

오늘 이 부활의 아침, 주님 안에 있는 죽음을 이기는 부활의 능력이 여러분과 함께하시기를 부활하신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오늘 우리에게 질문이 하나 있습니다. 현대 신앙인들이 가장 싫어하는 소리가 무엇인가하면 전도하라는 소리입니다. 전도프로그램을 만들고 조직을 하고 설교를 해도 잘 실행하지 못하는 것이 전도입니다.

 

어떤 교회에서는 다른 것은 다 할 테니 전도하라는 소리만 하지 말아달라고 부탁하는 성도님도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초대교회 성도들을 보시기 바랍니다. 오늘 우리는 전도하라고 해도 안하는 데 초대교회 교인들은 하지 말라고 박해하고 핍박해도 목숨 내놓고 전도했습니다.

 

예수 이름으로 말하지도 말고 가르치지도 말라고 했을 때 그들은 너희 말을 듣는 것이 옳으냐? 하나님 말씀을 듣는 것이 옳으냐? 판단해보라고 말하면서 전도했습니다. 쫓겨 가면 거기서 전도했고, 피난가면 거기서 교회를 세웠습니다. 감옥에 갇히면 간수에게 전도했고, 매 맞으면 매를 때리는 사람에게 전도했습니다. 여러분 이 차이가 무엇 때문일까요?

 

왜 이런 차이가 있을까요? 그것은 한 마디로 부활의 감격의 차이입니다. 부활의 신앙을 가져야합니다. 오늘 본문의 여인들을 보십시오. 부활의 주님을 목격한 다음 그녀들은 제자들에게 달려갑니다. 그리고 말합니다. “사도님들! 저 좀 보세요. 오늘 새벽 저희가 주님을 보았습니다. 주님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 나셨습니다.” 여러분! 이 말 한 마디가 복음의 핵심입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부활의 사실을 믿는다면 그 사실을 전파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어야 합니다. 이제 오늘의 모든 성도들도 부활절의 여 성도들처럼 자신과 확신을 가지고 말해야 합니다. “예수님이 다시 사셨습니다.” “오늘 아침, 죽음 권세 이기시고 다시 사셨습니다.” 이 비밀을 숨겨 둘 필요가 없습니다. 말해야 합니다. 전파해야 합니다.

 

부활은 능력입니다. 주님의 부활은 지나간 사건도, 이미 끝나버린 이야기도 아닙니다. 오늘도 살아서 역사하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부활은 우리들의 극한 슬픔을 이기게 합니다. 부활은 우리의 절대절망을 절대희망으로 바꾸어 줍니다. 부활은 인간의 죽음을 정복하는 능력입니다.

 

부활은 곧 그대로 복음의 능력입니다. 주님은 이 부활절 아침에 우리들 모두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11:25-26) 아멘.